역대 1위 흥행 대작의 탄생, 그리고 20년 만에 주연 명함 판 배우의 ‘경이로운’ 비상

장항준 감독의 신작 <왕의 수호자>가 한국 극장가의 흥행 지도를 완전히 새로 그리고 있다. 1452년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나 숙부의 쿠데타로 3년 만에 폐위된 조선 제6대 왕 단종의 비극적인 생애를 그린 이 작품은 지난 2월 4일 개봉 이후 거침없는 흥행 질주를 이어갔다. 개봉 한 달 만에 천만 관객을 돌파하며 2024년 <파묘>와 <범죄도시4> 이후 2년 만에 처음으로 천만 고지를 밟은 영화가 됐다. 명절 대목의 파급력은 더욱 거셌다. 설 연휴 5일 동안에만 267만 명을 동원하며 해당 기간 전체 박스오피스 매출의 62.5%를 싹쓸이하는 기염을 토했다. 총제작비 690만 달러(약 90억 원)가 투입된 이 영화의 누적 관객 수는 1,475만 7,103명이다. 이는 <명량>(1,760만 명)과 <극한직업>(1,620만 명)에 이은 역대 3위의 기록이다. 놀라운 점은 극장 매출액이다. 1,425억 원을 벌어들이며 <극한직업>(1,396억 원)과 <명량>(1,357억 원)을 가뿐히 제치고 대한민국 영화 역사상 최고 매출 수익을 올린 1위 작품으로 등극했다.

궁중 암투를 넘어선 평범한 이들의 서사, 지역 경제까지 살리다

단종의 씁쓸한 최후를 둘러싼 역사적 기록은 여전히 엇갈린다. 교살되었다는 설과 폐위된 왕족의 일반적인 사사 방식인 독살을 당했다는 설이 팽팽하게 맞선다. 당시 세조는 조카의 시신을 강에 버리고 이를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하겠다는 엄명을 내렸지만, 말단 관리였던 엄흥도는 목숨을 걸고 시신을 몰래 수습해 현재의 장릉에 안장한 뒤 종적을 감췄다. 영화 제작사 온다웍스의 임은정 대표는 “권력자들의 단순한 궁중 암투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주목했다. 십 대 폐왕과 촌장의 관계를 서사의 중심에 둔 것이 관객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흥행 요인을 짚었다. 슬픈 역사적 서사가 주는 묵직한 감동과 주연 배우 유씨, 박씨의 혼신을 다한 열연은 폭발적인 입소문을 낳으며 개봉 초반을 훌쩍 넘긴 시점까지 다회차 관람 열풍을 견인했다. 영화의 흥행은 지역 경제에도 활력을 불어넣었다. 단종의 유배지였던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와 장릉에는 관광객이 구름처럼 몰려들고 있다. 영화 개봉 후 4주 동안 영월 내 2,161개 관광 관련 업체의 매출은 전월 대비 35.7%나 급증했다. 군 전체 인구(35,917명)의 두 배에 육박하는 7만 명 이상의 방문객이 두 핵심 유적지를 다녀가며 이른바 ‘단종 투어’ 신드롬을 입증했다.

“우리가 시대를 잘 만났어”… 평범함이 무기가 된 시대

화려한 권력자보다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는 평범한 사람들의 진정성이 대중을 사로잡는 현상은 비단 영화의 소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채우는 배우들의 면면도 달라지고 있다. 전형적인 미남미녀 주인공의 공식을 깨고, 오랜 시간 내공을 다져온 배우들이 극의 전면에 나서며 대중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배우 염혜란은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온몸으로 증명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최근 동료 배우 라미란과 “우리가 시대를 잘 만났다. 그래서 주인공을 하는 거다”라는 대화를 나눴다는 그는 “이제는 나처럼 생긴 사람이 늘 아줌마 역만 하는 게 아니다. 지적인 역할도 소화하고, 주변에 있을 법한 평범한 외모의 능력자들이 주목받는 변화 덕에 나 같은 사람도 쓰임을 받는다”고 말했다. 2000년 극단 연우무대의 연극 <최선생>으로 데뷔한 그는 20대 젊은 시절부터 줄곧 엄마나 이모 같은 윗세대 배역을 도맡아 왔다. 2003년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 단역을 거쳐 <아이 캔 스피크>, <증인>으로 영화계에 얼굴을 알렸고, <디어 마이 프렌즈>를 시작으로 <도깨비>, <동백꽃 필 무렵> 등 굵직한 드라마에서 대체 불가능한 존재감을 뽐냈다. 그리고 마침내 데뷔 20년 만에 영화 <빛과 철>로 첫 장편 주연의 자리에 올랐다.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 배우상을 안겨준 이 작품을 필두로, 첫 주연 드라마 <경이로운 소문>의 대성공, 나란히 개봉한 영화 <새해전야>와 <아이>까지 연달아 선보이며 그야말로 종횡무진 활약 중이다.

조연에서 주연으로, 인지도보다 중요한 ‘오래 연기하는 삶’

오랜 무명과 조연 시절을 버텨내고 마침내 주연의 타이틀을 거머쥔 소감은 깊고 단단했다. 연극만 하다가 영화와 드라마 매체로 넘어올 때 치열한 사회에 처음 내던져진 대학생 같았다면, 주연을 맡은 지금은 한창 사회생활을 하던 중 번듯한 직책과 명함을 받은 기분이라고 그는 묘사한다. 월급이 늘어난 만큼 감당해야 할 책임의 무게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배종대 감독이 연출한 <빛과 철>에서 교통사고로 2년째 의식불명인 남편을 돌보는 아내 영남을 연기하며 그는 전에 없던 새로운 얼굴을 꺼내 보였다. 친근하고 둥글둥글한 인상 너머로 스치는 서늘하고 차가운 눈빛을 포착한 감독의 안목 덕분이었다. 조연 시절과 달리 대본을 펼쳐놓고 감독과 치열하게 의견을 나누며 캐릭터의 뼈대를 세워가는 과정은 배우로서 짜릿한 경험이었다. 유독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연대하는 역할을 자주 맡아온 염혜란은 작품을 고를 때 담긴 메시지를 중시하며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본다. 과거에는 힘을 얻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널리 전하기 위해 인지도 높은 배우가 되기를 꿈꿨다. 하지만 대중적 인기는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며 오히려 독이나 두려움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이제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대선배 나문희처럼 그저 오래도록 연기하는 것이다. 대중을 실망시키는 구설수 없이 삶을 올곧게 살아내며 무대와 카메라 곁에 머무는 것. 20년 만에 자신의 이름이 박힌 주연 명함을 파고 새롭게 비상하는 배우 염혜란의 묵직한 진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