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마블의 행보는 어딘가 위태롭다. 대대적인 리더십 개편이 단행되었지만, 이것이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브래드 윈더바움이 코믹스, TV, 애니메이션, 프랜차이즈 전반을 총괄하도록 승진했고, C.B. 세불스키 편집장 역시 그에게 보고하는 체계로 바뀌었다. 그 과정에서 오랜 기간 마블을 이끌었던 댄 버클리와 데이비드 가브리엘을 비롯해 세 명의 편집자가 회사를 떠났거나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하지만 윗선의 책상이 어떻게 바뀌든, 코믹스 매장 최전선에서 독자들을 직접 마주하는 이들의 평가는 서늘할 정도로 냉혹하다.
샌디에이고에서 ‘나우 오어 네버 코믹스(Now or Never Comics)’를 운영하는 애런 트라이츠는 SKTCHD의 ‘오프 패널(Off Panel)’ 팟캐스트에 출연해 현재 매장에서 마블의 성적표가 얼마나 처참한지 가감 없이 털어놓았다. 그의 묘사에 따르면 마블 타이틀은 단순히 DC나 이미지 코믹스에 밀리는 수준이 아니라 절대적인 기준에서 부진의 늪에 빠져 있다. 작가 댄 슬롯이 팬들에게 스파이더맨을 제발 사달라고 애원해야 했던 웃지 못할 촌극이 왜 벌어졌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트라이츠의 매장에서 마블 코믹스 정기 구독자 수는 말 그대로 바닥을 기고 있다. 단행본 구독자가 한 자릿수에 불과한 타이틀이 수두룩하며, 심지어 ‘어벤저스’의 경우 현재 구독자가 단 두 명뿐이라고 그는 꼬집었다. 대화 도중 언급된 방식의 어벤저스 타이틀이 현재 출간 중이 아니라는 지적도 있었으나, 본질적인 문제는 변하지 않는다. 마블의 IP들이 사람들의 지갑을 열게 만들 만한 기대감을 전혀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DC의 상황은 딴판이다. 마이너 캐릭터로 여겨졌던 ‘파이어스톰’조차 예상을 뛰어넘는 매진 행렬을 기록하고 있으며, 25달러짜리 번들 상품은 매장에 입고되는 족족 팔려나가고 있다. 독자들의 열광적인 에너지가 DC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버린 셈이다.
종이책 시장에서의 활력을 잃어버린 마블이 과거의 유산에 집착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수순일지도 모른다. 최근 마블 세계관의 아버지라 불리는 故 스탠 리의 목소리와 초상이 AI 기술을 통해 부활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수백만 대의 디지털 기기에서 그의 상징적인 인사말 “엑셀시어(Excelsior)!”가 다시 울려 퍼질 날이 머지않았다.
2018년 95세의 나이로 타계하기 전까지, 그는 펄프 코믹스의 주인공이었던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판타스틱 4, 엑스맨을 전 세계적인 스크린의 아이콘으로 키워냈다. 은퇴 후에도 마블 영화의 카메오 코믹콘 행사장에서 보여준 친근한 모습으로 새로운 세대의 팬들을 사로잡았던 그가, 이제 생성형 AI 오디오 개발사인 일레븐랩스(ElevenLabs)와의 계약을 통해 디지털 아바타로 돌아온다. 스탠 리 유니버스의 이사이자 변호사인 채즈 레이니는 “팬들은 만화를 읽을 때 늘 스탠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고 말해왔고, 이제 일레븐랩스 덕분에 그것이 현실이 되었다”고 포브스(Forbes)를 통해 밝혔다. 포브스는 이를 두고 “현실판 마블 좀비”라는 뼈있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물론 세상을 떠난 거물급 인사가 스크린에 다시 등장하는 것이 스탠 리가 처음은 아니다. ‘분노의 질주 7’ 제작 도중 사망한 폴 워커의 디지털 재현이나, 기록 보관소의 영상과 AI를 활용해 개봉 예정작 ‘As Deep as the Grave’에 등장할 발 킬머의 사례도 있다. 심지어 오슨 웰스의 ‘위대한 앰버슨가(The Magnificent Ambersons)’의 유실된 장면들을 복원하기 위해 세상을 떠난 원작 배우들을 디지털로 살려내는 작업도 수년째 진행 중이다.
스탠 리의 목소리는 일레븐랩스의 ‘아이코닉 보이스 마켓플레이스’에 합류하여 마이클 케인, 존 웨인, 리카르도 몬탈반 같은 전설적인 스타들의 인공 음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예정이다. 그의 첫 번째 행보는 ‘스탠 리 이달의 책 클럽’의 일환으로 고전 ‘보물섬’을 낭독하는 것이다. 위대한 명배우 로렌스 올리비에 경의 묵직한 목소리가 10대들의 게임 팟캐스트를 더빙하는 시대에, 이 전설적인 인물들이 살아있었다면 자신의 디지털 클론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코믹스의 부진과 AI 기술을 빌린 과거의 부활이라는 다소 기묘한 행보 속에서도, 마블의 진정한 저력을 증명하는 돌파구는 영상 매체에서 열리고 있다. MCU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로 꼽히는 애니메이션 ‘엑스맨 97’이 마침내 두 번째 시즌으로 돌아온다. 마블은 5월 27일 공식 보도자료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시즌 2의 공개일을 7월 1일 수요일로 확정 짓고, 팬들의 기대를 한껏 끌어올릴 압도적인 첫 트레일러를 함께 공개했다.
90년대의 상징적인 만화 ‘엑스맨: 디 애니메이티드 시리즈’의 후속작인 이 작품이 첫 선을 보인 지도 벌써 2년이 흘렀다. 전작의 충격적인 결말이 어떻게 시즌 2로 이어지는지 가물가물한 시청자들을 위해 디즈니+와 마블은 친절하게 새로운 시놉시스를 제공했다. 이번 시즌에서 영웅적인 돌연변이 팀 엑스맨은 여러 시간대로 뿔뿔이 흩어진 채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처절한 사투를 벌인다. 그들이 사라진 1990년대의 지구에서는 수상한 적들이 활개 치고, 돌연변이를 향한 새로운 형태의 혐오와 배척이 싹트기 시작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번에 공개된 티저와 방영일이 다가 아니다. 엔터테인먼트 위클리(Entertainment Weekly)의 보도에 따르면, 총괄 프로듀서 래리 휴스턴은 이 마블 페이즈 6 프로그램이 최소 4개의 시즌으로 기획되었다고 밝혔다. 시즌 3 제작이 확정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었으나, 시즌 4가 적극적으로 개발 중이라는 공식적인 언급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활력을 잃은 코믹스 매장과 AI라는 기계장치에 기대어 생명력을 연장하는 과거의 유산들 사이에서, 잘 만들어진 애니메이션 하나가 위기의 마블을 지탱하는 가장 든든한 동아줄이 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