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극이 된 웹툰 ‘정년이’, 전석 매진 비결?

“온다, 온다, 온다…. 왕자들이 들어 온다, 장부들이 들어 온다!”

단원들의 거동 하나에도 여기저기서 ‘꺄악’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오는, 1950년대 서울 최고의 여성 국극단 ‘매란 국극단’. “소리꾼 혼자 소리하는 판소리와도 다르고, 연기만 하는 연극과도 다르고, 춤만 추는 무용, 말만 하는 재담과도 다른” 여성국극은 말 그대로 극 중 모든 배역을 여자가 맡는다.

남자는 씩씩하고 여자는 가녀리다는 관념에서 벗어나, ‘살고픈 세상’과 ‘되고픈 사람’을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는 해방구와 같은 무대. 그러나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거기에 관객을 사로잡는 연기와 인물까지, 모든 것이 조화를 이뤄야 오를 수 있는 자리다. “목포에선 소리깨나 했다”는 자부심 하나만 가지고, 지긋지긋한 가난을 피해 극단 문을 두드린 16살 윤정년은 그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다.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네이버에서 인기리에 연재된 웹툰 ‘정년이’는 신선한 ‘여성국극’이란 소재를 통해 소녀들의 야망과 도전, 성장을 그렸다. 여성 서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과 함께 2020년 ‘올해의 양성평등 문화콘텐츠상’을 수상하는 등 작품성을 인정받았고, 배우 김태리를 주연으로 하는 드라마 제작이 추진되는가 하면 실제 창극으로도 각색됐다. 다음 달 17일부터 29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펼쳐지는 국립창극단의 신작 ‘정년이’가 그 작품이다.

공연 준비 7주차를 보내고 있는 ‘정년이’ 배우와 제작진은 오늘(23일)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정년이’가 언젠가는 여성국극을 주제로 한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싶다는 꿈을 이뤄준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이제 쉽게 만날 수 없는 장르가 됐지만, 1940년대 후반부터 50년 초반까지 전국적으로 인기를 끈 여성국극은 가부장적 사회와 여성성에 대한 반기였다. 원작 만화 역시 이를 통해 자유롭고 당당한 세상에 대한 여성들의 열망을 담았다. 창극 ‘정년이’가 주목한 것도 이 부분이다.

극본과 연출은 맡은 남인우 연출가는 “국립창극단 ‘정년이’는 여성국극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여성국극을 소재로 정년이의 성장기를 그리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고 설명했다. 137화에 이르는 원작을 어떻게 무대에 옮길까, 고민이 들 때마다 인물의 성장과 연대가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됐다. “보통 미디어에는 여성들이 서로 질투하고 시기한다고 나와 있지만, ‘정년이’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성장과 욕망에 충실하면서도 악역이 없어요. 정년이의 경쟁자인 허영서마저 궁극적으로는 연대의 마음을 공유하고 있거든요.”

원작과 달라진 부분도 있다. ‘극 중 극’으로 등장하는 ‘자명고’의 결말이다. 만화가 정년이의 예술적 성장에 중점을 뒀다면, 창극에선 여성주의 관점을 보탰다. 원작과 달리 낙랑공주는 자명고를 찢지 않는다. 호동왕자 역시 전쟁 대신 평화의 길을 택한다. 전석 조기 매진, 심지어 추가로 열린 3회차 공연마저 모두 팔릴 만큼 ‘여성 서사’에 뜨겁게 호응해 준 팬들에 대한 고민의 결과다.

더블 캐스팅된 이소연, 조유아 소리꾼도 자신만의 특색과 개성을 보태 주인공 정년이를 연기한다. 조 씨의 정년이가 능청스럽다면, 이 씨는 섬세하다. 음색도 딴판이다. 조 씨는 구성지고 호소력 짙은 목소리를 가졌고, 이 씨는 또렷하고 맑은 창법으로 가사를 전달한다. 국극단 무대를 염원하는 16살 정년이에서 어린 시절 자신을 보았다는 두 사람은, 서로 다르면서도 닮은 정년이를 선보이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극 중에서 정년이가 어머니에게 ‘국극 마치고 박수 소리를 들으면 컴컴해서 보이지도 않던 관중석이 다 보이고 눈앞이 훤해지고 세상 만물이 눈 앞에 들어온다, 나 눈감고 살기는 글렀다’고 하는 부분이 있어요. 오디션 대본으로 이 대목을 받고 첫 문장을 읽자마자 울컥 눈물이 나더라고요. 저희는 이미 무대와 관중을 통해서 무대 맛을 본 사람이니 너무 공감이 갔죠. ‘정년이’는 우리가 해야 하는 이야기고 또 창극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이소연)